1318호 6면

에로스와 타나토스

 

줄리언 반스(Julian Barns)의 <종말의 예감(The Sense of an Ending)>을 읽고

 

한영국

 

T.S. 엘리엇은 ‘태어남과 사랑(혹은 性)과 죽음’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태어나니 사랑해야 하고 사랑에서 죽음이 온다는 인과관계도 포함해서가 아닐까. 이 주제를 가지고 70을 바라보는 한 노인이 잊혀지고 왜곡되고 감추어졌던 생의 진실들을 마주해 가는 이야기가 줄리언 반스(1946-)의 ‘종말의 예감’이다. 이 소설은 2011년 출간돼 북커 상을 받았다.

 

시대의 정상과 비정상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 책임을 어느 만큼 완수하면서 평이하게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을 몰랐던 1960년대 런던. 똘똘 뭉쳐 다니는 고교 친구 콜린과 알렉스와 토니 앞에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키 크고 내성적인 아드리안이 나타난다. 그들은 지성적인 이 새 친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선생님들도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나이가 시키는 대로 책이 고프고 이성이 고프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book-hungry, sex-hungry, meritocratic, anarchistic)이면서 철학에 심취한 또래들 사이에서 아드리안은 특출하고 독특한 존재다.

 

어느 날 아이들은 롭슨이라는 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발표되지 않은 자살의 이유에 대해 온갖 소문이 무성하다가, 결국 여자친구를 사귀다 임신시켰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이성교제가 매우 드물었던 시절,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 아이들은 그 죽음이 비철학적인 방종이며 그릇된 도피라고 생각한다.

고교 시절의 마지막 역사 수업. 선생은 학생들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소설의 화자인 토니가 “역사란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하자 선생은 “패자의 자기기만”도 염두에 두라고 말한다. 콜린은 역사란 양파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라고 하고, 아드리안은 “불충분한 사실의 기록이 기억의 결함과 만나 만들어지는 확신”이라고 정의하면서 롭슨의 죽음에 대한 소문을 예로 든다. 한마디로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겠다. 선생은 아드리안에게 일기나 검시관의 보고서, 편지나 전화내역 등 사실증명이 가능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이라고 조언한다.

 

사랑의 시작

졸업 후 그들은 일생에 걸친 우정을 다짐하며 각자 자신의 길을 간다. 아드리안은 예상대로 캠브리지로 떠나고, 토니는 브리스톨 대학에 진학한다. 토니는 같은 도시에서 대학에 다니는 베로니카를 알게 돼 사귀지만, 서로의 관심사나 신분이 썩 맞는 것은 아니다.(영국은 계급사회다.) 그들은 데이트를 하면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토니는 애인을 사랑하고 서로를 맞추어가면 갈수록 성(性)에 대한 집착은 멀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의아해 한다.

그 시절의 풍습 대로, 토니는 베로니카네 집을 방문해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씁쓸한 기억이다. 그는 베로니카의 아버지와 캠브리지에 다니는 그녀의 오빠가 신분이 낮은 자신을 좀 무시하지 않나 싶어 마음이 불편한데, 그를 남겨두고 산책을 나가버린 식구들 대신 베로니카의 엄마인 세라가 편하고 캐주얼하게 그를 대하며 식사를 차려준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 딸을 너무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말라고까지 충고한다. 그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세라에게 호감을 느낀다.

 

토니는 차차 멀어져가는 유년의 친구들에게도 자랑삼아 그녀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번 강에 가서 강물이 걷잡을 수 없이 파도치며 역류해 올라가는 Severn Bore을 구경하기도 한다. 세번 볼은 이 소설에 장치된 중요한 메타포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세번 강의 볼(해일)은 토니에게 장엄한 자연의 불가사의가 아니라 무언가 부정하고 불안하고 잘못된 현상으로 기억된다.

 

종말의 시작

그들의 연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는 아드리안에게 호감을 갖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것저것 의견충돌이 생기면서 그녀는 토니를 멀리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그들은 헤어지고 나서 우연히 만난 어느 날 잠자리를 같이한다. 사랑에 따르는 책임을 밀어낸 자리에 성(性)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고 나서 토니는 세라에게서 편지를 받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딸과 헤어진 토니를 못마땅해 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두둔한다.

 

졸업반, 토니는 아드리안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베로니카와 자신과의 교제를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마음대로 하라고,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는 결국 베로니카는 오래 전에 이미 망가진 여자라는 맹랑한 답장을 쓴다. ‘망가진 여자’라는 표현은 그의 상상의 산물이다.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자기편을 들어주던 세라를 생각해낸 그는 아마도 베로니카가 아빠나 오빠에게서 학대를 받았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래서 세라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귀띔한 걸 거라고 말이다. 그는 모든 것은 세라에게 물어보면 다 안다고 덧붙여 아드리안에게 부친다. 질투에 기인한 “패자의 자기기만”이다. 그렇게 편지로 복수를 하고나서 그는 자신의 평이한 삶에서 그 둘을 지워 없애고자 한다.

 

졸업 후 미국 여행을 하고 있는 토니에게 아드리안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장례 절차까지 소상히 적어 남기고는 세상을 등졌는데, 검시관에게 남긴 공식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삶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진 선물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삶의 본질과 그에 따른 조건을 숙고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 원하지도 않는 삶을 거부하기로 작정했다면, 그는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할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책무를 진다.’ 친구들은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복해 보였다고 의아해 한다. 하지만 토니는 주어진 것이라고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능동적인 의지로 자신의 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친구의 태도가 ‘행동하는 지성’만 같다. 그 결정이 비록 죽음이라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친구가 형편없는 여자 베로니카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죽은 거라고 추측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의 삼각관계에서 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실게임

오랜 세월이 흘렀다. 40여 년의 세월이다. 토니는 결혼도 하고 딸 수지도 낳아 키우고 이혼도 거치고 정년퇴직까지 했다. 이제 그는 자원봉사를 하며 혼자 살고 있다. 마침내 평온에 도달했다고 강변하지만, 아픔이든 기쁨이든 젊은날의 강렬했던 감정이 그립고 아쉽다. 시간이 많으니까 기억을 떠올리고, 그 사이 자기연민과 피해망상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그는 기억=사건+시간(memory=events+time)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은 접착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용매제로 기능해 사실을 왜곡하고 허물고 변형시킨다. 아드리안의 일도 그럴 뻔 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라가며 과거의 사건을 풀어간다.

 

어느 날 그는 뜻밖의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유언집행 변호사가 보낸 편지다. 베로니카의 엄마 세라가 죽으면서 그에게 500파운드의 돈과 아드리안의 일기장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베로니카도 아니고 베로니카의 엄마인 세라가 왜 아드리안의 일기를 자신에게 물려주려고 했을까? 현재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는 일기장은 좀처럼 그에게 양도되지 않는다. 그는 연락이 끊겼던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집요하게 일기장을 요구한다. 그러다 변호사를 통해 달랑 한 페이지의 복사본을 받는데, 거기에는 인간관계의 이런 공식이 쓰여 있었다. B=S-V+(x)A1, B=A2+V+A1xS. 그리고 그 페이지의 마지막 말은 ‘만일에 토니가…’였다.

 

그 한 페이지의 불완전한 일기장을 보면서 토니는 아드리안에게 새삼 매료된다. 표현이 좋아 평이하고 안온한 삶이지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자신의 일생과 비교해보니 더욱 그렇다. 삶의, 그리고 사랑의 덧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뻔한 쳇바퀴에서 과감히 뛰어내린 친구가 새삼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있어 보인다.

 

승자는 없고…

우여곡절을 거쳐 그는 베로니카를 만나지만, 백발이 성성한 둘의 대화는 마냥 삐걱거린다. 삶이 외롭고 지루한 토니는 베로니카와의 새로운 연정을 꿈꾸어 보기도 하지만, 그녀는 차갑고 불가사의하고 까다롭다. 일기장 대신 그녀는 토니에게 오래 전 그가 아드리안에게 보냈던 편지를 건네준다. 그는 베로니카와의 교제에 대해 자신이 친구에게 썼던 편지를 읽으며 놀라고 전율한다. 자신의 기억과는 달리, 그것은 차라리 두 사람에 대한 저주였다. ‘난 시간의 복수를 믿으니까 너희가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복수는 당사자에게 가야 하는 거니까 죄 없는 아이가 아니라 너희 둘이 받아야겠지. ……’

 

이 편지로 인해 그의 내부에서 세 번 강의 해일처럼 기억이 역류해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삶은 ‘평균적 진실과 평균적 도덕이 담긴 평균적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은 부정하고 불안하고 잘못된 역사였던 것이다. 그는 회한에 휩싸이며 베로니카에게 사과의 이메일을 보낸다.

 

어느 날 베로니카는 그에게 일련의 장애인들을 보여준다. 그녀가 왜 그들을 보여주는지 이해하지 못하자 그녀는 “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또다시 절교를 선언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드리안의 일기장은 이미 태워버리고 없다고 주장한다.

토니는 무작정 그들 장애인들을 찾아다니며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드디어 어느 날, 그는 아드리안을 닮은 장애인 하나를 발견하고는 큰 충격에 빠진다. 결국 자신의 저주 대로, 아드리안과 베로니카는 장애인 아들을 낳았나 보았다. 그는 자신의 기억과 이 상황의 증거들을 세심히 추론해 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 아드리안의 죽음이 사랑이나 신념, 혹은 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기인한 결단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그 옛날 롭슨의 경우처럼, 여자친구의 임신이라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 회피, 현실 도피(taken the easy way out)외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드리안이 아무리 검시관에게 그럴듯한 유언을 남기고 포장했어도, 결국 역사는 의미도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토니는 자신의 저주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에 떨며 장애인 아들과 살아야 하는 베로니카를 돕고 싶어 한다.

 

타나토스의 승리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장애인을 돌보는 사람에게서 그는 뜻밖의 진실을 듣는다. 장애인의 어머니는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로니카의 엄마 세라라는 사실을 말이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엄마가 아드리안과 낳은 장애인 동생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토니는 비로소 아드리안의 공식을 이해한다. 첫 공식 B=S-V+(x)A1 은 베이비(B)가 베로니카(V) 없이 아드리안(A1)과 세라(S)의 관계의 산물임을 시사하고, 두 번째 공식 B=A2+V+A1xS 는 베이비가 토니(Anthony=A2)는 물론 베로니카, 거기다 아드리안과 세라와의 관계가 더해져 생긴 결과임을 말하는 것이다. 아드리안은 이 불행한 임신을 처음에는 자기와 세라의 책임으로 인지했지만, 더 나아가자 그들 네 사람 모두의 연대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소설에서 반즈는 엘리엇의 삶의 정의에 항의한다. 롭슨이나 아드리안이나 모두 사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사랑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자신의 비겁 때문에 죽은 것이다. 거기다 세라의 딸에 대한 질투와 토니의 아드리안에 대한 질투가 불행의 단추를 차근차근 끼워 나갔다. 토니나 세라나 아드리안이나 모두 사랑은 없고, 사랑에 대한 질투와 사랑의 결과로부터의 도피만이 있었을 뿐이다. ‘만일에 토니가…’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만일에 내가…’로 고쳐 쓰여야 했다. 사랑이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고, 사랑 때문에 죽음이 온 것도 아니다, 사랑이 빠져나가고 없는 빈 공간에 질투와 성이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에로스를 누르고 또다시 타나토스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태어나면서 이미, 그리고 인간만한 크기의 사랑에서 벌써, 종말은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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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영정 사진>

 

차충재 명예기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 품으로 들다

 

유영촌 바오로 형제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향으로 먼 길 떠나신 바오로 형제님, 이승에 계실 때도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 안에 부르심을 받으셨으니 주님 품 안으로 평안히 가셨음을 믿으며 저희들 기도 안에 보내드립니다. 새해 첫날 인사차 전화드렸더니 부인께서 어제 주님이 부르셔서 주님 품으로 드셨다는 말씀 듣고 섭섭했습니다만 주님 하시는 일이니 이 중생이 어떻하겠습니까? 주님께 바오로 형제를 부탁드리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바오로 형제 떠나시기 얼마 전에 수산나와 함께 봉성체 해드리려고 갔던 것이 마지막 생전에 뵙는 일이 될 줄은 짐작을 못했던 일이고 정초에 전화드렸던 것도 언제 뵐 수 있을까 여쭈어 보려는 마음이는데 섭섭했습니다. 미련한 인간이 무엇을 있었겠습니까. 주님 뜻을 따르는 수밖에 방법이 없더라구요.

 

살아생전에는 안온한 웃음으로 대해 주셨던 항상 내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주님 부르시면 가는 길 주님 부르시는 가서 만나 우리 웃으며 만날 기약하면서 먼저 보내드립니다.

 

평소에 항상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셨던 기억합니다. 성가대 지휘자인 이 바오로의 아파트가 에어컨 없이 지내는 것을 알고 갖고 있던 에어컨을 가져다 달아 준 일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불쌍한 처지의 동료들을 도우신 일들 주님께서 어여삐 알고 계실 겁니다. 동생 주교 신부 두신 것도 은총 받은 일이지요. 출중한 달란트 유인촌 동생도 주님 은총이고요.

 

우리 함께 가톨릭 시니어 미션, 노인들 주님의 은총의 살게 해주려 노력했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묵묵히 접수부터 모든 궂은 일들 마다하지 않으시고 봉사하신 일 감사드립니다. 성당 골프 토너먼트 있을 때마다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들 희사하신 일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우리 이승에서의 삶은 언제 주님 불러가실지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 누구는인생제행무상이라 했던 모양입니다.

 

무상의 이승 삶을 잘 마무리 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주님 대전에서 영생복락 누리실 줄 알며 이만 붓을 놓겠습니다.

 

주님, 베드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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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촌 바오로는 고 유탁(베드로), 박금순(루치아) 4 2녀 중 셋째이며 동생은 탤런트 유인촌, 막내동생은 유경촌 주교이다. 12 31() 4 40분에 선종하여 지난 5() 유경촌 주교 집전으로 퀸즈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했다. 유 바오로는 퀸즈성당 골프동호회장, 사목부회장 그리고 가톨릭신용조합 이사장을 역임했다.

 

 

1319호 6면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기>

 

주님의 섭리와 경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윤재영 요안나

버밍햄 한인 천주교회, 앨라배마

 

한 때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에 대해서 몰랐던 때가 있었다. 주님께서는 내 마음은 물론, 어디든 계신다고 했기에 구태여 성지를 찾아봐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해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하신 곳을 다녀 온 후 앞으로는 성지를 중심으로 여행을 다니고픈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임시로 일할 기회가 생겨 여유돈이 생겼다.

 

없는 대로 잘 살다가도 돈이 생기면 갑자기 쓸 데가 많아진다. 때마침 성지 순례가 있다는 이메일을 받으면서 쉽게 결정되었다.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간다고 하였더니 주위 사람들은 하나 같이 걱정했다. 이집트 국경에서 한국 순례객 버스에 자폭 사건이 있었고 TV에서 납치 살해와 관련된 테러 사건이 연신 보도 되고 있었다. 내심 걱정되었지만 그렇게 위험하다면 여행사 사장님께서 먼저 취소하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것을 따지자면 사는 그 자체가 목숨 걸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성지 순례는 가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짐은 물론 마음도 가벼워야 했기에 우선 마음에 걸리는 분들한테 화해의 전화를 했다. 가족들한테 이스라엘 가서 주님께 봉헌해 줄 테니 기도 하나씩 적어 달라고 하고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울지들 말고 “나는 포도나무요…….”(요한 15, 5-10)를 읽어 주며 주님을 찾을 것을 약속받았다.

 

여행사의 요한 사장님이 룸메이트가 궁금하지 않냐고 전화로 물어보셨다.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자매님인지 몰라도 우리는 이미 주님 안에서 만난 것이다. 좋으면 좋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 안에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떠나는 날이다. 비행장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기겁을 했다. 평소에 장이 나빴지만 이렇게 피설사를 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죽을병에 걸린 것도 모르고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이집트에 도착한 다음날까지 계속 소화가 안 되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꾹꾹 눌러 지압을 하며 주님께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이집트 카이로 시내를 버스로 달리는데 공기도 탁하고 우중충한 건물과 무질서한 차량을 보고 왜 이런 곳을 왔는가 싶었는데 어마어마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2박 13일 여행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주님의 섭리와 경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동의 평화가 이루어져 많은 사람들이 순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카이로에서 홍해를 건너 12시간 버스를 타고 시나이 산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안전을 위해 일정이 바뀌었다.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 남쪽 ‘룩소’에 가서 카르낙 신전, 왕가의 계곡, 그리고 장제전을 보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시나이 반도 맨 끝인 ‘샴웰 쉐이크’에 가서 잠수함을 타고 홍해 바다 속 산호초 용궁을 보너스로 구경하고 시나이 산 아래 숙소로 갔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2시에 출발한다고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더니 여전히 피를 무섭게 토해냈다. 그런데다 예전에 접질렸던 발목이 잘못 걸으면 신경을 건드려 시큰했다. “모세님, 여기까지 왔는데 갈 수 있으면 가게 해 주세요.” 모세님한테 비는 수밖에 없었다. 깜깜한 새벽, 출발 전 호텔에서 터번을 쓴 베두인 젊은이가 커피를 타 주었다.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그건 상관이 없었다. 고마울 뿐이었다.

 

양들은 목자의 말을 듣는다. 손전등에 의지해 앞사람을 따라 한 발 한 발 발을 떼며 ‘쉬세요.’ 하면 쉬고 ‘갑니다.’ 하면 일어나 걸었다. 낙타 정거장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그동안 계속 따라오던 낙타를 타기로 했다. 별이 총총 내리 쏟아지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낙타를 타고 가시는 성모님도 이런 느낌이셨으리라. 정상에서 미사를 보고 내려오는데 나의 모습은 거대한 돌산에 묻힌 작은 돌멩이였다. 밤에 한 줌도 못 주무셨다는 룸메이트 데레사 자매님은 연세가 75세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앞에서 끄떡없이 걸어가고 계셨다.

 

그날 국경 세 개를 넘어 요르단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다리만 딴딴할 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더욱 놀란 것은 피설사가 기적처럼 멈춘 것이었다. 날아갈 듯 기뻤다. 황무지인 사막을 달리건만 신기해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장미의 도시’라는 페트라에 갔다. 높디 높은 바위와 바위 사이 좁은 협곡의 경관과 모양과 이어진 색들의 조화는 기가 막히게 경이로웠다. 자연은 완벽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지나쳤을 요르단이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가보아야 할 곳인 것 같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을 데리고 가나안에 가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주요 장소에 들렀다. 신명기 민수기에 나오는 지역 이름들 에돔, 모합, 아르논 계곡, 암몬 등등이 이제 낯설지 않다. 특히 세례자 요한이 참수된 헤로데 마케루스 요새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는 느보산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 대로 살며 일생을 바치셨던 그 분들의 절대적 순종에 가슴이 뭉클했다.

 

요르단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예수님께서 영세를 받으셨다는 바로 그 요르단 강이었다. 물에 손을 담그자 감격해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예리코에서 키가 작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올라갔다는 나무를 보자 나도 그 위에 올라가보고 싶었다. 예수님의 고장 카파나움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보며 미사를 드렸다. 햇살에 반사된 고요한 호수에 물안개가 살며시 지나가는 것이 마치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 같았다. 행복 선언을 하시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를 치유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신 곳을 돌아보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드셨을 물고기와 빵을 먹으며 그들이 타셨을 배를 타보며 주님을 가까이 뵙는 것 같아 눈물겹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가나에서 첫 기적을 일으키신 혼인 잔치기념 성당에서 부부끼리 온 사람들을 위해 혼인 갱신식이 있었다. 보기에 좋았다. 강론 중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주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스스로 경비를 들여서 온 것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말의 뜻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주님이 불러주시고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스라엘에서 사흘은 너무 짧았다. 정신없이 뺑뺑이 돌리듯 ‘왔다. 보았다. 찍었다.’ 그리고 걸었다. 일단 사진기에 담아 놓고 되새김질하기로 했다. 베드로가 세 번 배신했던 닭 울음 성당과 예수님이 갇히셨다는 감옥을 보니 실감났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성모님이 서 계셨던 자리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막상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는 곳을 만져보는데도 별 다른 느낌이 오지 않아 섭섭했다.

 

마지막 날 밤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깼다. 창가에 달이 유난히 환하게 비추었다. 밝은 달 주위에는 빛이 퍼져 마치 십자가 모습으로 보였다. 유리에 반사되어 그렇게 보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무척 기뻤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씨앗이 들어 있었다. 겨자씨가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듯 잘 키워 나도 그렇게 되어 보고 싶다. 다녀온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이드가 알려준 테오필로 신부님의 ‘성지 이스라엘’ 블로그를 통해 공부를 하며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와서 맛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 찬미와 영광 드리며 순례하는 동안 심금을 울리는 노래도 불러주시고 미사 드려주신 이창항 세바스찬 신부님, 재치 있는 유머와 인자한 미소로 바람막이를 해 주신 우주관광 올랜도 김내순 요한 사장님, 서로 배려하며 건강하게 동행했던 고마운 일행들, 그리고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버밍햄 한인 천주교회 조중희 가브리엘 신부님과 형제자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주님을 가까이 뵙는 것 같아 모든 것에 감동

겨자씨가 자라나 주렁주렁 열매를 맺듯 변화되고 싶어

‘와서 맛보라’고 하신 신부님 말씀 잊지 못해

‘양들은 목자의 말을 듣는다’ 말씀처럼 순종하는 기쁨

 

사진 설명:

  1. 갈릴래아 호수의 배타는 선착장.

  2. 세례자 요한이 참수된 장소, 헤로데왕의 마케루스 요새.

  3. 시나이산 아래 성 카타리나 수도원

  4. 베드로의 닭울음 성당.

  5.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가나 결혼기념 성전 제대 앞.